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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은 이름뿐이었는가? - 한국사 정리

한국사 정리

by 수집쟁이 2025. 3. 5.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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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과연 한반도에 존재했을까? 낙랑군 외 진번, 임둔, 현도는 실제로 설치되지 않았을 가능성 제기하는 학설들이 있습니다. 신채호, 북한 학계 등은 요동 지역 설파하였습니다. 평양 봉니, 고분 등 낙랑 존재 증거는 명확합니다만, 사마천의 '사기' 기록에 대해 비판적 해석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한사군에 대해 정리하였습니다.

 

한사군은 이름뿐이었는가? - 한국사 정리
한사군은 이름뿐이었는가? - 한국사 정리

 

 

한사군은 이름뿐이었는가?

 

 

서론

 

한나라가 조선을 병탄한 후 곧바로 차질 없이 4군을 설치했을지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습니다. 전통적으로 한의 4군, 즉 낙랑, 진번, 임둔, 현도는 한반도 전체를 다스렸던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일제 강점기 역사학자들은 이를 식민지 경영으로 해석하며 한국 역사의 시작점으로 보려 했고, 한국 역사학계도 이러한 견해를 일부 수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한국이 한때 중국의 식민지였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기존 학설과 문제점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한나라는 기원전 108년 조선을 병탄한 후 낙랑, 임둔, 진번 세 군을 설치했습니다. 낙랑군은 대동강을 중심으로 남쪽 일부 지역, 임둔군은 강원도 지역, 진번군은 황해도 지역을 관할했다고 합니다. 이듬해 현도군을 설치하여 옥저와 예의 땅을 다스리게 했으나, 현도군은 현지 세력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 기원전 75년 요동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설치 20년 만에 폐지되었고, 낙랑군만이 유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신채호의 주장

신채호는 한의 4군이 실제 설치된 것이 아니라, 멸망한 지역에 대한 가상적인 행정구역 설정에 불과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낙랑군 또한 실제로는 요동 지역에 있었던 것을 오해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둘째, 북한 학계의 주장

북한 학계는 한의 4군을 인정하지만, 그 위치를 대동강 주변이 아닌 요하 하류 일대로 보고 있습니다. 당시 요하는 현재의 요하가 아닌 대릉하를 가리키며, 현도군 역시 압록강 유역에 설치되었다가 고구려의 저항으로 서쪽으로 이동했다고 주장합니다.

 

셋째, 남한 일부 학계의 주장

남한의 일부 학자들도 신채호와 북한 학계의 주장에 유사한 견해를 보이며,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고 주장합니다.

 

 

낙랑군의 실존과 논쟁

 

한사군을 조선에 설치된 식민지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견해이지만, 낙랑군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 또한 타당하지 않습니다. 한나라는 조선을 침략하여 승리한 후 굳이 왕검성을 버리고 요동에 낙랑군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평양 일대에서 발견된 200여 개의 봉니에는 낙랑태수와 낙랑의 군현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를 위조품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대부분은 당시의 진품으로 추정됩니다. 평양 일대에서 발견되는 중국식 덧널무덤과 벽돌무덤, 중국 제품 유물들은 당시 중국 문화를 누리던 집단이 존재했음을 증명합니다.

 

 

사기 기록의 해석

 

'사기'에는 한이 4군을 설치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죄인이었기에 한무제의 정복 전쟁을 비판적으로 서술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는 4군에 대해 "드디어"라는 표현을 쓰고 군현의 이름도 밝히지 않았는데, 이는 계획만 있었고 실행되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결론

 

낙랑군의 실존은 인정해야 하지만, 현도군은 고구려, 마한, 예맥의 연합 공격으로 축출되었고, 낙랑군 역시 조선의 전 영역을 차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진번군과 임둔군은 곧 폐지되었고, 낙랑군만이 일부 영역을 관할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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