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은 한나라가 설치한 군현으로, 한국사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치적 지배뿐 아니라 선진 문물을 전파하여 사회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종이, 철기, 불교, 건축술 등 다양한 문화적 충격은 삼국 시대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한나라의 침략과 직접 지배 방식인 군현의 설치가 우리 역사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고대에는 끊임없이 침략 전쟁이 일어났고, 침략 전쟁에 맞서 저항하면서 민족적 자각이 일어나고 고대 국가가 성장했다. 또한, 앞에서 보아온 대로 한사군은 18, 19세기에 일어난 제국주의적 식민지 경영과는 지배 방식이나 경제 침탈의 수준으로 보아 양상이 매우 다르다.
문화의 전파라는 의미에서는 또 다른 해석이 있을 수도 있다. 특히 고대 사회에서는 활발한 문화 교류가 사회 발전의 거름이 된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이때는 결코 한국사가 단절된 시기가 아니었다. 하나의 보기를 들면, 서기 100년에 중국에서 세계적인 문화 혁명이 일어났고 문화 혁명은 그 중심지인 낙양에서 가까운 우리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 가교 역할을 낙랑군에서 맡았던 것이다.
채륜은 한나라 조정의 환관이었으나 남다른 학구열이 있어서 훌륭한 학자로 우러름을 받았고, 왕의 명으로 유교 경전의 교정 작업을 주재하기도 하였다. 그는 경전이나 문서를 죽간이나 목간에 쓰는 불편을 고치려고 고심하였다. 그때까지 모든 문자는 죽간이나 목간에 썼고 중요한 문서는 비단에 쓰기도 하였다. 채륜은 나무껍질, 삼의 자투리, 베의 넝마 따위를 재료로 하여 종이를 만들어냈다. 논어를 쓴 죽간만 해도 소달구지 한 대 분량이었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손으로 들 수 있게 되었고 값도 싸고 이용하기에도 편리했다. 종이가 나오자 문서의 보관 운반은 말할 나위도 없었고 책을 찍어 보급하는 데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낙랑군에서 종이로 된 문서와 책을 어느 때에 이용하고 보급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본토와 많은 격차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종이는 한나라 관리나 망명자들에 의해 빠른 속도로 이웃 나라에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일찍부터 종이 제조와 인쇄술이 발달했다.
한나라는 주변 국가를 정복하면서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였다. 특히 인도 등 서역의 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입하였다. 이중에 불교 경전이 섞여 있었다. 한무제는 불교 전파에 제일 큰 공로자였다. 중국의 불교문화는 우리나라 삼국으로 전해져서 토착 신앙과 결합하여 새로운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도교도 이때에 널리 전파되었다.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중국에는 전국 시대부터 철기 문화가 널리 보급되었는데, 수준 높은 철기 기술이 낙랑군을 통해 유입되어 무기와 농기구와 생활 도구를 만들어내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어 청동이나 쇠로 만든 돈을 사용하였고, 섬세하고 화려한 장신구도 만들어냈다.
건축술의 보급도 빼놓을 수 없다. 중국의 고대 건축술은 세계에서 첫손가락을 꼽는 수준이었다. 지금의 서안 일대에 널려 있는 진, 한, 당의 유물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평양 일대에서는 당시에 사용했던 기와 파편이 무수히 발굴되었다. 삼한이나 부여, 옥저의 일반 서민들은 그때까지도 거의 움집이나 반움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삼국 시대 초기의 주거 형태를 보면 목재로 지은 기와집이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덤 양식의 변화도 있었다. 그전에는 고인돌 무덤과 돌무지 무덤이 무덤 양식의 중심을 이루었는데 이 무렵에는 덧널무덤과 벽돌무덤으로 바뀌었다. 나무로 널을 만들고 시신을 그 안에 넣어 구덩이를 파고 묻는 장례와 벽돌로 무덤을 만들고 그 안의 공간에 시신을 안치하는 장례이다. 덧널무덤은 전해지지 않아 그 자세한 양식을 알 수 없으나, 벽돌무덤은 바로 천 년의 신비를 벗겼다고 떠들썩했던 백제 무령왕릉과 같은 양식이다. 이 무덤이 차츰 유행하자 큰 노동력이 들어가는 고인돌 무덤과 순장의 풍속이 없어졌다.
낙랑군의 수부는 주변 국가의 통로였고 정보를 전달하는 곳이었다. 광무제가 회유책을 쓰며 봉작과 인수를 남발할 때 이곳에서는 여러 나라의 인물과 사정을 염탐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태수는 이를 평가하고 감전하는 임무를 띠었다. 또 남쪽이나 동쪽에서 중국의 낙양으로 갈 때는 평양을 거쳐야 한다. 후한 시대에 왜노국의 사절은 낙랑군을 거쳐 낙양으로 갔는데, 일단 낙랑군에서 군관의 안내를 받아야 했다.
지금까지 낙랑군에 관해 비교적 꼼꼼히 살펴보았다. 정치 군사적으로 우리나라는 한때 핍박을 받았으나 낙랑군의 통치는 정치적 명분과 무역 확보라는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후기에 와서는 오히려 명목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낙랑군은 자국의 선진 문화를 전파하여 토착 세력에게 일대 문화 충격을 주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상당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볼 때 낙랑군이 우리 역사 최초의 식민지 수탈 기지였다는 관점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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