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무제는 오랜 숙원이었던 동방 경략을 위해 낙랑군을 설치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중화주의와 천자의식을 실현하는 행보였다. 낙랑군은 한반도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변 국가를 분리 통치하고 통일 세력 형성을 저지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또한, 한나라는 분리 및 분할 정책을 통해 조선의 부흥 세력을 약화시키고 지배력을 강화하려 했다.
대동강 남쪽 언덕바지는 중국 한나라 사람들로 들끓었다. 울긋불긋한 관복을 늘어뜨린 한나라 관리들이 분주하게 거리를 오갔다. 행인들 중에는 교활한 장사꾼과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헤매는 이주민들도 적지 않았다. 한나라는 엄청난 대가와 희생을 치른 전쟁을 끝내고 군현을 조선 땅에 건설하게 되었다. 오죽했으면 한무제의 조선 침략을 직접 바라보았던 사마천은 "드디어 조선을 평정하고 사군을 만들었다"라고 썼을까.
한나라의 조선 침략은 무제의 마지막 정복 전쟁이었다. 그는 지금의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 서역을 차례로 정복한 뒤 끈질기게 버티는 조선을 맨 마지막으로 엄청난 물량을 투입하여 침략, 정복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한나라는 중국 역사상 진시황을 능가하여 사방의 이웃 나라와 직접 접촉하는 최초의 시대를 열었다.
한나라 정복 전쟁의 의미를 무역이나 조공 따위 경제적 이유에서만 찾는다면 정확하게 파악할 수가 없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천자의식과 중화주의에 있었다. 문명이 우월한 중국에게 오랑캐들은 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런 의식에 사로잡힌 한무제를 호되게 비판했다.
낙랑군을 설치함으로써 한무제는 좁은 의미로 따져 두 가지 욕망을 달성했다. 하나는 오랜 숙원인 동방 경략이 달성된 것이다. 한나라는 건국 초기부터 요동군을 설치하고 꾸준히 동방 경략을 도모했으나 위만과 우거왕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차질과 좌절을 겪었다.
이럴 때 예맥사회의 유력한 족장인 예군 남려가 기원전 128년 우거왕을 배반하고 28만 명을 이끌고 요동에 귀속하였다. 예기치 않은 소득이었다. 한무제는 이들을 회유하여 인수를 주고, 창해군을 설치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창해군은 직할령이었다. 창해군의 근거지는 지금의 압록강 상류에 있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창해군을 설치한 뒤 연나라, 제나라 땅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대 이주가 시작되었다. 관리들도 섞여 있었다. 험한 길을 새로 뚫기도 힘들었고 양식을 짊어지고 이사하는 데에 엄청난 경비가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렵사리 뚫어놓은 길도 조선의 방해와 차단이 계속되어 경비가 엄청나게 들었고 인적 손실이 거듭되었다. 이런 어려움을 감당해 낼 수가 없어 창해군을 설치한 지 몇 년 만에 철폐하고 말았다. 한무제는 동방 개척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는데 이 꿈이 이때 실현된 것이다.
다음은 직접 지배 방식이 실현된 것이다. 한무제는 처음 우거왕에게 조공을 바칠 것과 다른 나라의 조공 또는 무역 통로를 막지 말 것을 요구했다. 우거왕이 이를 들어주었다면 침략할 명분이 없었을 것이다. 한무제는 막상 공격을 하였으나 엄청난 손실을 입고 한때 철수를 각오하기도 했다. 군사력으로는 승리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하자, 왕검성의 대신들에게 재물이나 작위를 주겠다고 꾀어 내분을 일으켜 함락시켰던 것이다.
이제는 자기 나라의 군현을 조선 땅에 두고 마음대로 태수를 임명하여 부리게 된 것이다. 그는 남쪽의 삼한이나 북쪽의 부여, 옥저 등 동이의 나라들이 늘 한나라를 거들떠보려 하지 않거나 때로는 마지못해 거짓으로 심복한 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낙랑군의 위치는 한반도 한복판이었으니 조선을 비롯한 동이의 나라들을 분리시켜서 통치할 수가 있었다. 한나라로서는 통일 세력의 형성을 저지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한 것이었다. 한나라의 통치 방식은 분리 정책을 쓰는 것이었다. 조선의 정치 세력과 유민들은 남쪽과 북쪽으로 달아났다. 그 결과 남북에는 병렬적인 국가군이 형성되었다.
한나라의 회유에 몸을 판 자들은 중국으로 가서 쥐꼬리만한 식읍을 받았다. 한나라는 조선의 유민을 옮겨 살게 만드는 등 분리 정책을 폈다. 그리고 중국계 유민을 조선 땅에 정착시키고 토착민과 유리시키는 분할 정책도 썼다. 조선의 부흥 세력을 철저하게 약화 또는 분리시키는 정책이었다. 이를 염두에 두고 낙랑군의 군치도 원래 조선의 수도였던 대동강 북쪽에서 남쪽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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