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조선 혹은 위만 조선은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을까요? 이 글은 위만조선 멸망 과정과 그 의미를 담은 글입니다. 대신들의 배신, 왕의 죽음, 항복과 저항, 전쟁의 역사적 평가, 그리고 조선 멸망이 한국 고대 사회에 미친 영향 등을 다룹니다.
이제 좌장군은 맹렬하게 왕검성을 공격하였다. 조선의 대신 왕협 등 네 사람은 누선장군이 체포된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주전만을 내세우는 우거왕을 따르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했고, 항복하지 않고 조선이 망하면 회유 미끼로 내건 상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더욱이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가 시일을 늦출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왕과 백성을 배반하고 몰래 도망쳐 항복하고 말았다. 그래도 우거왕은 잘 버텨냈다.
배반의 모의자에 참여했으면서도 성안에 남아 있던 이계상 직책의 참이 기회를 엿보다가 부하를 시켜 우거왕을 살해하였다. 참이 왕을 죽이고 항복했는데도 왕검성은 함락되지 않았다. 주전파였던 대신 성기가 우거왕에 이어 군사를 지휘했다. 성기는 백성을 안돈 시키고 군사를 격려하며 굳세게 버티었다. 좌장군은 태자와 대신의 아들을 꾀어 성기를 죽이도록 했다. 끝내 성기도 같은 조선 사람의 손에 죽고 말았다.
성기는 조선의 종말과 함께 죽었다. 서기전 108년 여름이었다. 전해 가을부터 싸움이 시작되어 여름까지 왔으니 1년 가까이 전쟁을 치른 것이다. 위만이 세운 조선은 3대 86년 만에 다른 민족의 손에 망하고 말았다. 이때 왕검성은 처음으로 쑥대밭이 되었다.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정복 국가였던 조선은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지만, 위만조선의 정신과 전통은 고구려로 이어졌다.
사마천은 이 전쟁을 이렇게 논평하였다.
우거는 견고함을 믿다가 나라를 잃었으며, 섭하는 공을 속이다가 전쟁의 꼬투리를 만들었다. 누선은 장수감이 못되어서 난을 맞아 죄에 걸렸으며, 변방의 실패를 후회하다가 도리어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결국 좌장군과 누선장군은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가 된 자가 없었다.
사마천이 사태를 정확하게 판단하여 정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이 말처럼 위만조선 대 한나라의 싸움은 장수나 군사들의 전공도 인정받지 못한 누더기 전쟁이었다. 한무제의 체면도 말이 아니었다. 비록 한나라는 사군을 설치하여 동쪽에 식민지를 만들었으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순체는 전후에 공을 다투고 시기하여 계획을 그르쳤다는 죄로 저잣거리에서 찢겨 죽었다. 양복은 죽음을 면하기는 했으나 단독으로 왕검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한 책임을 물어 서민으로 강등되었다. 마지막까지 이 모양이었으니 사마천의 한탄 섞인 결론이 나온 것이다.
위만조선 대부분의 고위 대신들은 목숨과 영화를 찾아 항복했지만, 성기는 죽음의 길을 택했다. 그는 위만조선을 끝까지 지키려는 왕의 뒤를 이어 적과 분전하던 백성들의 여망에 따랐다. 이와 달리 네 명의 대신과 태자는 항복하고 협조한 공로로 한나라의 열후가 되어 중국 땅의 식읍을 받았으나 얼마 못 가 껍데기 영화는 흐지부지되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민족이 최초로 쳐들어온 이 침략 전쟁은 한국 역사에 특별한 의미를 던져주었다. 이민족의 침략에 맞서는 국가 수호의 정신을 배웠고, 북쪽이나 서방의 이민족들에 대한 경계심을 함양하기도 했다. 위만조선의 멸망으로 한사군이 등장하고, 북쪽의 부여 계통의 나라와 남쪽의 삼한이 고대 국가로 성장하면서 한국 고대 사회는 새로운 정세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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