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쪽에서 일어난 부여와 여러 나라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송화강가에 나라를 세운 동명왕과 부여의 기원과 위치, 그리고 부여의 생활 모습과 고구려 건국 설화와의 관계를 다룹니다. 또한 동명왕의 탄생 설화와 그 의미를 살펴보고 정리하였습니다.
송화강가에 나라를 세운 동명왕, '부여'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친숙하게 들립니다. 강대한 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도 부여에 뿌리를 두었고, 남쪽으로 내려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백제의 조상도 부여였습니다. 백제는 후기에 백마강가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백제 왕실의 후손들은 자신들을 부여씨라고 칭했습니다. 부여가 민족 정서로는 친근하게 느껴지지만, 그 영역은 사실 지금의 우리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만주 땅의 송화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합니다. 백두산 천지에서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두만강의 첫 물줄기가 내려갑니다. 천지의 한 가닥 물줄기가 북쪽으로 흐르다가 첫머리에서 폭포를 이루고는 넓은 들판을 적시며 흘러 강을 이룬 것이 송화강입니다. 그 상류 기름진 땅에 부여는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쯤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부여의 지배 세력이나 구성원들은 동이족의 한 갈래인 맥족입니다.
부여 사람들의 생활은 그리 문명화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무렵 중국에서는 무쇠로 된 농기구를 한창 사용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이 일대는 남쪽의 삼한보다 중국 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으며, 예맥족은 북쪽의 청동기 문화를 주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부여는 여전히 돌로 된 농기구를 주로 썼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농사도 화경과 휴경의 방법을 썼습니다. 산이나 들에 불을 질러 일군 밭에 씨앗을 뿌려 수확을 하고는 다시 몇 년간 밭을 묵히는 것입니다. 땅심을 자연의 섭리에 맡겨두고 인위적으로 높일 줄 몰랐던 것입니다.
주거 생활도 여전히 움집 위주였습니다. 아직 땅 위로 올라와 생활할 줄 몰랐습니다. 기후가 추워서 지상 가옥의 출현이 남쪽보다 늦어진 것이기도 하나, 아직 미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첫 임금이 나타나 공식적으로 나라를 세웠습니다. 바로 동명왕입니다. 동명왕의 탄생 설화를 보겠습니다.
북쪽에 고리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나라 왕의 시녀가 임신을 하였습니다. 왕이 시녀를 죽이려 하자, 시녀는 "달걀만 한 크기의 어떤 기운이 저의 뱃속으로 떨어져서 임신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뒤에 시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왕이 그 아이를 돼지우리에 버리자, 돼지가 입김을 불어 따뜻하게 해 주어 죽지 않았고, 마구간에 옮겨 놓았으나 말도 입김을 불어주어 죽지 않았습니다. 왕은 천제의 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 어머니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동명이라 하고 말을 사육하도록 하였습니다. 동명이 활을 잘 쏘자 왕은 자기 나라를 빼앗길까 두려워 죽이려 하였습니다. 동명이 달아나서 남쪽의 시엄수(압록강의 지류로 보임)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동명이 물을 건너간 뒤에 물고기와 자라가 흩어져서 추격하던 군사는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동명은 부여 지역에 도읍하여 왕이 되었습니다.
동명왕이 이주단을 이끌고 와서 처음부터 부여를 세웠는지, 이주하여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왕이 되었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이 설화는 1세기 말 중국 사람 왕충이 쓴 논형 등 여러 책에 실려 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은 성이 고씨이고 이름이 주몽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몽은 부여 말로 '활을 잘 쏘는 사나이'를 가리킨다고 하면서 고구려의 시조 주몽을 동명성왕으로 만들어 놓았고, 또 고씨로 창성한 것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뒷날 고구려가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뒤 부여에 고분고분 대하지 않고 맞서자 부여왕 대소는 전면적인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유리왕에게 편지를 보내 "나의 선왕과 너의 선군 동명왕은 서로 잘 지내왔는데....."라고 꾸짖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와 달리 삼국유사에는 북부여와 동부여로 나누어서 적고 설화로는 드물게 정확한 연대를 표시하였습니다. 삼국유사에는 천제가 스스로 북부여를 세우고 이름을 해모수라 하면서 왕이 되었고, 그 아들 부루가 뒤를 이었다고 하였습니다. 해부루는 천제의 명에 따라 도읍을 동해 쪽에 있는 가섭원으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동부여라고 하였습니다. 해부루는 아들이 없었는데 바위 사이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아이를 얻어 금와라 하고 태자로 삼았습니다. 금와가 왕이 되었고, 그 아들 대소 때에 와서 고구려에 망했다고 써놓았습니다.
사실이 이와 같다면 부여는 북부여와 동부여로 나누어졌고 4대로 왕국이 끝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적어도 700~800년을 이어온 부여가 아무리 설화라지만 이렇게 짧은 기간에 끝났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멉니다. 부여가 천제의 명을 받아 도읍을 옮긴 것도 주몽의 고구려 성립이 예정된 것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김부식보다 100여 년 뒤에 태어난 일연이 고려의 정신을 받들어 설화를 조작했던 것입니다. 더욱이 불교가 들어오지도 않은 시대에 불교식 이름인 '가섭원'이라는 지명을 적어 놓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부루와 동명왕과 주몽은 부여와 고구려 건국 설화에 얼기설기 얽혀 있습니다.
동명왕은 북쪽의 고리라는 예맥족이 세운 나라에서 흘러 들어왔습니다. 그는 정령으로 태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위 설화의 "어떤 기운"은 그의 이름이 "동쪽이 밝다"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아 태양의 정령을 나타낸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은 감생 출탄의 설화는 만주와 몽골 일대에 널리 퍼져 있으며 우리나라 고대에도 자주 등장합니다. 태몽에 태양이 입으로 들어갔다든지, 뱀의 정령이 사람으로 환생했다든지 하는 따위들도 여기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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