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고대 국가 부여의 복잡하고 독특했던 사회상을 심층적으로 분석합니다. 왕권과 제가의 견제, 사출도로 대표되는 지방 통치 시스템, 그리고 윷놀이에 반영된 사회상 등을 통해 부여의 지배 구조를 상세히 살펴봅니다. 또한,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한 생활상, 엄격하고 가혹했던 형벌 제도,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 등 부여 사회의 다양한 측면을 조명합니다. 특히, 윷놀이 속에 담긴 부여의 천문 사상과 지배 구조, 엄격한 형벌 제도 속에 숨겨진 지배층의 의도를 분석하여 부여 사회를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고대 국가 부여의 흥미로운 면모를 발견하고,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여는 남성 위주의 일부다처제 사회였습니다. 부여의 지배 체제는 왕을 정점으로 하되, 제가평의회에서 모든 주요 사항을 결정했습니다. 이는 왕이 절대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초기에는 가뭄이나 큰 재앙이 있을 때 제가평의회에서 왕을 내쫓거나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제가평의회는 부여 초기 사회가 중앙집권적인 지배 체제를 갖추지 못했음을 나타냅니다.
제가는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이렇게 네 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대신으로서 각기 한 지방을 맡아 다스렸습니다. 그 아래 사자가 붙은 벼슬들이 있었으며, 이들이 중앙의 지배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지방에서는 호민이 지방과 중앙의 중개자 역할을 하며 지배자로 군림했습니다. 그 아래에는 주로 조세와 부역을 부담하고 전쟁에 동원되는 민과 하호가 있었으며, 천민 신분인 노비가 있었습니다. 하호는 부분적으로 노동력을 강제당했고, 노비는 토지 소유가 금지되었습니다.
이러한 복잡한 지배 구조와 제가의 역할에 대해 "그 나라의 읍락은 모두 제가에 소속되었다"든지, "제가들은 별도로 사출도를 주관하는데 큰 곳은 수천 가이며 작은 곳은 수백 가였다"라고 삼국지 등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신채호는 윷판의 말밭 다섯이 전시 체제에서 다섯 부분으로 군사 조직을 만든 출진도의 모형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윷판의 말들, 즉 도는 돗가로 저가를, 개는 개가로 구가를, 윷은 유가로 우가를, 모는 말가로 마가를 표시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걸의 의미는 밝히지 못했는데, 이는 이두 문자 표기를 우리말로 푼 것입니다.
이 다섯 짐승으로 다섯 방면의 신명을 삼거나 네 짐승으로 관명을 삼은 것은 수렵 시대가 지나고 농사와 목축을 하는 시대로 바뀐 것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윷이 부여에서 기원했는지 백제 시대부터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부여의 지배 체제나 관명으로 보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윷은 정해진 말밭을 하나하나 지나서 먼저 나는 쪽이 이기는 놀이입니다. 모는 가장 많은 다섯 말밭을 뜁니다. 모는 말을 나타내는 것이니 마가를 상징합니다. 마가가 제가 중에서 가장 윗자리에 있고 또 중요한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아랫자리는 말밭을 각기 하나에서 넷까지 뜁니다. 윷판은 둥글며, 이는 하늘을 나타냅니다. 그 주의를 둘러싸고 있는 말밭은 28개인데, 이는 하늘의 별 28수를 나타냅니다. 한가운데의 말밭을 뱅이라고 하는데, 천원을 나타내는 임금의 자리입니다.
네 방면에는 각기 말밭 다섯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는 제가들이 한쪽씩 맡아 다스리는 지역을 나타냅니다. 이를 사방으로 길을 낸다는 뜻으로 사출도라 불렀습니다. 임금의 자리인 천원을 중심으로 해서, 천원을 빼고는 각 방면에 두 개의 말밭을 배치했습니다. 이곳을 기내라고 할 수 있는데, 각 지방에서 거두어들이는 공물의 숫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28수는 모든 인민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윷판에 가축이 등장하고 말밭이 나오는 것은 당시의 생산 관계를 표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부여의 지배 구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부여 사람들은 영고와 같은 제천 행사 때 윷놀이를 했을 것입니다. 백제 시대에 세워진 익산 미륵사의 주춧돌에는 윷판이 새겨져 있습니다. 부여 계통인 백제에서 윷놀이 체계를 완성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여의 지배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에 '사출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이는 고대 국가가 지방을 지배할 때 기본이 되는 도로와 그 주변의 읍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또한 행정 구역이 아니라 중앙 부족을 중심축으로 하여 방위에 따라 사방을 나누고, 그 지방의 유력한 부족들이 각기 행사권을 쥐고 중앙의 제가들과 연맹 관계를 맺은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서기 1~2세기 무렵, 부여는 제후와 같은 권력을 가진 제가들이 연맹하여 국가를 형성하고 왕을 정점으로 한 군장 사회의 단계를 거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라에 큰 재앙이 있을 때 왕을 내쫓거나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지방의 호민들은 중앙 권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조세와 부역 또는 전쟁 동원 등 국가 기본권 행사에 일선 책임자가 되었습니다. 민은 사유 재산을 소유하고 있으면서 모든 국가 부담의 원천적인 대상이 되었습니다. 하호는 자기 경영을 하는 탓으로 노비의 처지는 아니었으나 최하층민이었습니다. 노비는 전쟁에 노역만 제공할 뿐, 전투에는 직접 나서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개별적으로 권력자에 예속되어 있었고 순장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한꺼번에 100여 명씩 순장을 하기도 했습니다.
부여의 지배 구조 아래에서 시행하는 형벌은 엄격하고 가혹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살인자의 가족들은 보조리 호적에서 뽑아내 노비로 삼았습니다. 이는 연좌제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가족의 범위가 부모나 처자에게만 해당되는지 동거자 전부를 포함시키는지는 확실하게 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형벌이 엄격하고 가혹해서 모든 동거자를 포함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도둑질하면 훔친 물건의 열두 배를 갚게 했습니다. 이것이 일책십이법인데, 고대 사회에서는 드물게 보는 과중한 형벌이었습니다.
또한 남녀가 음탕한 짓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모두 죽였습니다. 투기를 가장 미워해서 죽이고 나서도 그 시체를 남산 위에 버려 썩어 문드러지게 했습니다. 친정집에서 그 여자의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 따위를 바쳐야 했습니다.
이토록 가혹하게 형벌을 시행한 것은 공동체의 조직 원리가 철저했기 때문이며, 경찰력 따위 국가 체제가 튼튼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위의 금지 조목에서 살인과 상해에 대한 처벌은 개인의 생명을 존중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둑질에 대한 처벌은 노비를 만들어내기 위한 착취의 수단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도둑질을 엄히 금한 것은 사유 재산 보호에 철저했던 것으로 추단할 수도 있으나, 그 사유 재산은 대부분 제가나 호민의 것이었을 테니 빈부 격차가 더욱 늘어났을 것입니다.
음란과 투기에 대한 금법은 철저한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가족 제도와 일부다처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음란과 투기의 절제를 여성이 지켜야 할 덕목으로 강조했지만, 사형에 적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이는 부여 사회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벌입니다. 여성 관련 조항들은 기자가 시행했다는 8조금법이나 삼한 사회의 규율에는 나타나지 않는 구체적이면서도 철저한 형벌입니다.
부여의 지배 세력들은 가혹한 국가 권력을 행사하여 노예를 계속 확보했고 생산 수단으로 부려먹었습니다. 이들을 대상으로 순장 제도가 보편화하는 현상도 굳어졌습니다. 또한 노비들에게는 군인이 될 자격을 주지 않고 노역에만 동원했습니다. 노비들이 전투 능력을 키워 지배 세력에 맞서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한 것이기도 하였으나, 계속 개인에 소속시켜 생산 노동에 부려먹으려는 의도였습니다. 지배 권력자들은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결국 건국 초기와는 달리 지배 세력들이 안일 속에서 지내다가 고구려에 망하고 말았습니다. 로마도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몰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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