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 돌무덤 변천사를 다룹니다. 신석기부터 철기시대까지 고인돌, 돌널, 돌무지, 널무덤 양식을 비교하고 시대 변화에 따른 무덤 형태 변화와 사회상을 분석합니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하여 영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를 추정해 볼 수 있습니다.
공동묘지 형태의 돌무지무덤에서는 돌널무덤도 많이 발견되고 있다. 돌널무덤은 석관묘라고도 하는데, 지하에 장방형의 석관 시설을 만들어 시체를 매장하는 무덤이다. 이는 고인돌무덤보다 먼저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인돌무덤의 발생 단계가 신석기시대라고 한다면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 돌널무덤 형식은 시베리아 지방에서 그곳 청동기시대에 나타나 우리나라로 넘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시베리아 형식은 머리 쪽이 높고 발 쪽이 좁아지는 특징이 있는데,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것이 많다.
돌널무덤은 벽을 한 개의 판석으로 짠 것도 있고 여러 개의 판석으로 짠 것도 있다. 하부 구조는 대부분 고인돌무덤과 비슷하다. 또 석회암층을 평평하게 판 다음 장방형으로 석회암 판석을 세워 네 벽으로 삼고 그 위에 여러 장의 판석을 가지런히 덮은 것도 있다. 돌널무덤 중에는 100여 기가 함께 조성된 집단무덤도 있다. 중심 널 옆에 작은 널을 잇대어 만들어 부모와 자식이 합장된 무덤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고, 부부를 합장한 무덤도 있다.
돌무지무덤은 일정한 구역에 막돌을 장방형으로 쌓아 묘역을 만든 것이다. 묘역 안에 여러 개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하나하나의 무덤을 살펴보면 돌널무덤도 있고 움무덤도 있다. 앞에 보기를 든 강상무덤과 누상무덤이 이 형식을 따르고 있다. 고인돌무덤의 덮개가 없어지면 돌무지무덤으로 오인될 수 있을 정도로 하부 구조가 비슷한 경우가 많다.
돌무지무덤은 강상과 누상의 경우와는 달리 묘의 시설에 차별이 없고 껴묻거리에도 차별을 두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남쪽 지방에서 이런 경우가 많은데, 대개 혈연관계의 집단묘지인 것으로 보인다. 고인돌무덤 이외의 다른 묘제에서는 껴묻거리에 큰 차이가 없다.
뒷날 변형된 형식으로, 남쪽에서 위석식 무덤이 나타나기도 한다. 묘의 주위에 고인돌보다 다리가 짧은 고임돌을 받쳐놓는 것이다. 위석식 무덤은 영산강, 보성강, 낙동강 유역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으며 제주도에도 있다. 모양이 병풍 같다고 하여 병풍식으로 불리기도 한다.
돌널 대신 독널을 쓰기도 했다. 독널이란 타원형 항아리처럼 만든 널로서, 그 안에 시신을 넣는다. 독널의 크기는 시체에 맞추었는데, 때로는 둥그런 항아리 한 개를 쓰기도 하고 때로는 두 개를 맞춰 쓰기도 했다. 독널은 주로 남쪽에서 유행했다.
신석기시대에 시작되어 청동기시대에 널리 퍼진 돌로 이루어진 여러 묘제는 축조 방식에 따라 고인돌, 돌널, 돌무지 따위로 나눌 수 있다. 그런데 철기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양상이 사뭇 달라졌다. 거대하거나 노동력이 많이 드는 돌무덤에서 널무덤, 곧 토광목관묘로 대체되어 갔다. 이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널에다 시신을 담아서 묻는 묘제이다.
널무덤은 철기시대인 기원전 1세기 무렵에 한반도 일대에 널리 전파되었다. 다시 말해 한나라가 조선을 멸망시킨 뒤 중국의 풍속이나 의례가 유행한 시기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인돌무덤은 차츰 사라지고, 나무널 또는 흙무덤으로 바뀌어 조선시대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고대 중국의 나쁜 풍습의 하나인 순장이 중국에서는 후대에도 부분적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를 일찍 없애버린 것은 우리 고대인들의 지혜였다. 흙무덤은 신분에 따라 크기는 달랐지만 인간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뜻에서나 묘제가 거창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좋은 풍속을 본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죽음과 장례와 무덤을 통해 옛날 인간 사회의 모습과 신앙관, 내세관 등을 알아볼 수 있으며, 역사 발전의 단계를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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