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기 시대의 마을과 주거 형태 변화를 다룬 글입니다. 울주 검단리 유적을 통해 당시 마을 구조와 방어 시설인 환호에 대해 설명하고, 움집에서 반움집, 지상 가옥으로의 변화 과정을 보여줍니다. 사회 변화와 환경에 따른 주거 형태의 적응, 그리고 공동체 생활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낙동강 하류에 자리 잡은 울주 검단리에는 청동기시대의 마을 흔적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마을 흔적 중 가장 큰 규모이다. 이 마을 유적에서는 마을을 둘러싼 길이 298m의 환호 흔적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조성 시기가 다른 집터 93기가 자리 잡고 있다. 1996년에는 창원시 남산 유적에서 깊이 2~4m, 길이 200m의 환호를 발견했다. 이 마을 유적들은 청동기시대 군장 사회의 중요한 근거이다.
환호는 마을을 타원형으로 둘러싸는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워 외부 침입자들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일종의 방어용 연못이다. 예전에는 산에 성을 쌓은 경우가 아니면 경주 월성처럼 대개 이런 해자를 만들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이중으로 만들기도 했다. 통로에는 다리를 놓아 올리거나 내리기도 했는데, 이 다리를 조교라고 불렀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다른 집단이나 부족의 노략질과 전쟁이 자주 일어났고, 환호는 이에 대한 대비책으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이때의 마을과 집터는 신석기시대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전에도 강가나 바닷가 또는 산 밑에 터를 잡았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고기를 잡거나 농사를 짓기에 편리한 곳, 필요한 물을 구하기 쉽고 햇볕이 잘 드는 곳을 고른 것이었다. 이때는 인구도 부쩍 늘어나고 마을도 곳곳에 많이 이루어졌지만 전쟁도 자주 일어났다. 그렇다고 강가나 바닷가나 양지바른 곳을 떠나서는 살기가 불편하니, 그런 곳 중에서 안전한 자리를 골랐다.
사람들은 바다나 강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약간 높은 자리를 골랐다. 마을은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주위의 들이나 구릉지대가 한눈에 들어오는 곳을 선호했다. 마을로 들어오는 통로의 동정을 한눈에 살펴보고 대처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속이나 바닷가에 있던 마을들도 모두 조망을 중시하여 인근의 섬이나 낮은 산속의 동정을 알 수 있는 환경 조건을 찾아서 자리를 잡았다. 환경과 외부 조건에 따라 마을을 형성했던 동옥저의 예가 《삼국지》에 쓰여 있다.
읍루는 배를 타고 다니며 노략질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옥저는 그들을 두려워하여 여름철에는 언제나 깊은 산골짜기의 바위굴에 살면서 수비하고, 겨울철 얼음이 얼어 뱃길이 통하지 않아야 산에서 내려와 마을에서 살았다.
경제생활 위주로 마을자리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사회가 변해가고 있었다. 마을자리의 조건을 따졌다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 사정이나 사회 성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와 조선에 와서도 십승지라는 살기 좋고 안전하게 피란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맸는데, 모두 외부에서는 마을이 잘 보이지 않고 마을 안에서는 바깥의 동정을 환히 알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시대에 들어와서 마을이 커진 것은 인구 증가와 생산력이 높아진 데에만 원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여럿이 생활 공간이나 문화 공간을 공유할 필요성을 느꼈다. 농사도 두레 형식의 공동 노동을 더욱 확대하고, 산신제나 동제 같은 의식에도 함께 참여하여 집단적 공감대를 넓혀 나갔다.
집의 구조도 많이 달라졌다. 비록 서서히 변화하기는 했으나 움집 모양에서 반움집 모양으로 바뀌고 있었다. 이도 추운 북쪽 지방과 따뜻한 남쪽 지방이 약간 다른 과정을 보여준다. 추운 지방에서는 움집을 지을 때 땅을 깊이 파서 주거 공간을 마련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땅의 기온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지붕에 덮는 보온 흙도 더 많이 올려놓았다. 조금 뒷시대의 모습이기는 하나 추운 지대인 송화강 유역에서 일어난 부여에서는 땅을 깊이 파서 굴집을 만들었다. 큰 집의 경우에 땅속으로 아홉 계단을 내려가서 방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와 달리 따뜻한 지방에서는 상대적으로 움집의 깊이도 낮게 만들고 지붕의 덮개나 벽체에 쓰는 목재도 얇은 것을 사용했다. 통나무로 벽체를 만들기도 하고 주춧돌을 사용하기도 했다. 남쪽에서 먼저 움집의 형식을 벗어나 반움집과 지상 가옥으로 발전해 나갔다. 지상 가옥은 철기시대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움집에서 반움집으로 변화를 추구한 것은 물질생활이 나아지고 자연 조건을 더 이용할 줄 알게 되었다는 뜻이다. 또 다른 사회와 활발히 접촉하면서 그곳의 집을 보거나 듣거나 배워오는 문화 접촉에서 파생된 것이기도 하다. 반움집은 시베리아와 한국, 일본에 걸쳐 나타나는 가옥 형태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말기에 나타나 청동기시대에 널리 퍼졌다고 보는데, 그 변화는 앞에서 말한 대로 매우 느리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변화에 따라 집의 형식이 다양해지고 규모도 커졌다.
우선 집 안 형식을 알아보자. 신석기시대의 움집은 거의가 원형이나 장방형이었다. 원형의 움집은 기둥을 세우지 않고 땅에 바로 통나무를 박아 손쉽게 지을 수 있다. 이렇게 하면 내부 공간이 작아질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차츰 반움집의 형태로 바뀌면서 장방형이 기본 모양새로 자리를 잡았다. 반움집은 거의가 장방형이라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이에 비해 청동기시대의 움집은 작은 공간의 장방형이나 원형이 뒤섞여 있다.
장방형으로 지으면 규모를 키울 수도 있고 만듦새도 다양하게 할 수 있다. 우선 기둥을 세워야 한다. 기둥을 세우면 당연히 벽체를 따로 만들게 된다. 기둥을 여러 개 세울수록 공간이 넓어지고 지상으로 올라가게 된다. 기둥의 숫자는 최소 네 개에서 열 개까지 늘어났다.
기둥은 통나무를 적당히 손질한 것이지 네모 기둥이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가는 것을 쓰다가 차츰 굵은 통나무를 썼다. 또 처음에는 땅을 적당히 고르고 다진 뒤 기둥을 세웠다가 점차 주춧돌을 박고 그 위에 올려놓았다.
기둥의 길이는 2~3m 정도였고, 이것이 세워지면 지상으로 솟게 되어 이에 맞추어 벽체를 만들어야 했다. 이때의 벽은 잔 나뭇가지나 갈대 같은 재료를 쓰고 그 위에 흙을 바르는 수준이었지만 일단 땅과 분리된다는 점에서 새로운 양식이었다. 벽체가 만들어지면 채광이나 통풍을 위해 창문을 내야 했다. 창문은 처음에는 부분적으로만 이루어졌을 것이다.
기둥과 함께 벽체가 서면 서까래를 걸고 지붕을 올려야 한다. 집 하나에 몇 개의 서까래를 올렸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아무리 작은 규모라도 적어도 열 개 이상은 썼을 것이다. 서까래는 경사지게 배열했다. 빗물이 흘러야 하므로 편편하게 배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집 모양이 장방형이라 서까래를 양면으로 배치하면 양쪽으로 경사가 진 지붕이 만들어진다. 이것을 뱃집지붕이나 맞배지붕이라고 부른다. 지붕을 받치는 본격적인 들보와 용마루가 처음부터 배치되지는 않았겠지만 무게를 버티기 위해 들보를 사용했을 것이다. 더욱이 네모지붕일 때는 무게를 이기기 위한 들보가 반드시 필요했다.
지붕은 무엇으로 이었을까? 먼저 보온 흙을 밑바닥에 발랐다. 보온 흙은 그전부터 사용했는데, 이때에 와서 지붕의 구조에 빼놓을 수 없는 기본 재료가 되었다. 전에는 그 위에 나무껍질이나 짐승 가죽을 얹었는데 이 무렵에는 풀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벼농사가 널리 퍼지면서 생활에 널리 짚을 이용 했으므로 지붕을 짚으로 이었을 것이다. 이는 뒷날에 일반 민가로 널리 지어진 초가집의 첫 단계 모습이다. 귀틀집이나 너와집의 초기 형식도 이때쯤 나타났다. 궁궐이나 관가 이외에는 기와집이 없었다. 당시의 궁궐 건축 양식이 전혀 전해지지 않아 실상을 알아볼 수는 없으나 중국의 영향을 받아 기와집이 등장했을 것이다. 또한 도시를 중심으로 지상가옥이 존재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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