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연결성이 증가했지만 진정한 소통은 줄어드는 역설적 시대입니다. 부버,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을 성찰할 수 있으며, 진정한 관계 회복의 필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궁극적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완전한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역설적인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전 세계 누구와도 즉시 소통할 수 있지만, 정작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시대입니다. SNS에서는 수백 명의 '친구'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진정한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인간의 관계를 '나-그것'의 관계와 '나-너'의 관계로 구분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점점 더 '나-그것'의 관계로 치닫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타인을 진정한 '너'로 마주하기보다는, 단순히 기능적 관계 속의 '그것'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 하이데거는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홀로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늘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가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화된 생활양식은 이러한 본질적 관계성을 저해하고 있습니다. 높은 아파트 벽은 이웃과의 자연스러운 교류를 가로막고, 바쁜 일상은 가족과의 대화마저 줄어들게 만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자유를 누리고 있지만, 동시에 그만큼의 책임과 불안을 떠안게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보호막이 사라진 자리에 찾아온 것은 실존적 고독입니다.
레비나스는 타인의 얼굴을 통해 무한한 책임이 부여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점점 더 타인의 얼굴을 마주하지 않게 됩니다. 화상 통화나 메시지로 대화하면서, 우리는 타인의 진정한 현존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이는 단순한 불편함의 차원을 넘어, 인간의 윤리적 감수성마저 둔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망은 있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말했듯, 인간은 자신의 한계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는 존재입니다. 현대의 고독이라는 도전 앞에서, 우리는 더욱 의식적으로 진정한 관계를 추구하고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가브리엘 마르셀은 '존재'와 '소유'를 구분했습니다. 진정한 관계는 '소유'의 차원이 아닌 '존재'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타인을 소유하거나 통제하려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마주할 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철학적 성찰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근본적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궁극적으로는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완전한 위로와 평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적 관계가 한계를 지니는 반면, 예수님은 영원한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는 점에서 우리의 궁극적인 고독을 채우시는 분이 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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