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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의 인구는 40만 명이었다 - 한국사 정리

한국사 정리

by 수집쟁이 2025. 3. 11.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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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벌판을 호령했던 고대 국가 부여는 40만 인구와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다투었습니다. 농업 혁신과 뛰어난 기마술은 부여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지배층의 사익 추구와 내부 분열은 결국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뿌리가 된 부여의 흥망성쇠는 오늘날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부여의 인구는 40만 명이었다 - 한국사 정리
부여의 인구는 40만 명이었다 - 한국사 정리

 

 

부여의 인구는 40만 명이었다

 

 

부여의 인구와 경제

 

부여는 국가 형성 초기인 기원전 3세기경 8만 호, 즉 최소 40만 명의 인구를 보유했습니다. 당시 부여의 영토는 만주 서쪽 장춘에서 북쪽 하얼빈, 동쪽 목단강 근방, 남쪽 백두산 아래까지 광활했습니다. 1~3세기경에는 서쪽 선비, 동쪽 읍루, 남쪽 고구려, 북쪽 약수(흑룡강 또는 제1송화강)를 경계로 삼았습니다.

 

인구 증가와 함께 농업 생산력도 발달했습니다. 화전과 휴한 농법에서 윤경 제농법으로 전환하고 철제 농기구를 사용했습니다. 주로 잡곡을 생산했으며, 19세기 말 조선 동포들이 이주하며 논농사가 전파되었습니다.

 

 

부여의 군사력과 정치

 

부여 전성기 인구를 40만 명으로 추정할 때, 조세와 군역의 의무를 지는 민은 20~25만 명, 실제 군 동원 가능 인력은 5만 명 정도였습니다. 부여는 하호(下戶)를 지배층의 사적인 영역에 예속시켜 국가 운영의 공적 시스템 구축에 실패했고, 이는 고구려와의 패권 경쟁에서 패배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부여 군사력의 핵심은 기병과 보병이었습니다. 명마 생산지로 유명했으며, 국유 목마장을 설치하여 군마를 길렀습니다. 기마 궁술에 능숙했고, 보병은 기병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부여의 외교와 멸망

 

부여는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북쪽 읍루를 지배하며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했습니다. 남쪽에서는 고구려와 경쟁하며 대립했습니다. 기원전 6년, 부여왕 대소는 고구려에 왕자 인질 교환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이후 5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침공했지만, 폭설로 큰 피해를 보고 철수했습니다.

 

이후에도 고구려와 수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번번이 패배했습니다. 고구려가 성장하고 한나라와의 긴장 관계가 심화되자, 부여는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압박했습니다.

 

그러나 국력이 쇠퇴하며 285년 선비족의 침공으로 왕이 자결하고 간도 지방으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346년에는 전연의 침공으로 왕이 납치되는 등 붕괴 직전에 놓였고, 결국 494년 고구려에 항복하며 600여 년의 역사를 마감했습니다.

 

 

부여의 의의와 평가

 

부여는 고구려, 백제의 뿌리가 된 나라로서 우리 역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중국 사가들은 부여를 다른 동이족 국가와 달리 호의적으로 평가하며, 예의범절을 중시하는 군자의 나라로 묘사했습니다. 이는 부여가 중국을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않고 비교적 조공 관계를 잘 유지했기 때문입니다.

 

부여는 졸본부여, 북부여, 동부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최근 학계에서는 송화강 상류의 초기 부여를 북부여, 간도 지방의 후기 부여를 동부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부여의 교훈

 

부여는 비옥한 땅과 풍부한 인구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의 사익 추구로 인해 대제국 건설에 실패했습니다. 반면, 고구려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는 개척 정신과 강력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대제국을 건설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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