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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물학 개론, 다윈과 생명의 의미 - 진화론의 전개

생물학 정리

by 수집쟁이 2020. 9. 9.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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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도 결국 생물 중에 한 존재임을 기억할 때, 생물학은 외면적인 인간에 대한 탐구의 기초학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물학은 다윈과 그의 과학적인 관찰부터 시작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다윈이 진화론을 본격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다

 

목차

     

    1. 먼저 읽어보면 좋은 글

    2020/09/07 - [생물학 정리] - 1. 생물학 개론, 다윈과 생명의 의미 - 다윈의 고민이 시작되다

    2020/09/08 - [생물학 정리] - 2. 생물학 개론, 다윈과 생명의 의미 - 다윈의 고민이 짙어지다

    2020/09/08 - [생물학 정리] - 3. 생물학 개론, 다윈과 생명의 의미 - 과학적인 방법으로 연구하다



    2. 생물학 개론, 다윈과 생명의 의미 - 진화론의 전개

     

    (1) 진화론의 전개

       오랜 항해가 끝날 무렵 비글 호가 남대서양의 어센션 제도(Ascension Island)에 도착하자 다윈은 누이동생들로부터 온 편지를 받았다. 편지는 비글 호에서 헨슬로에게 보내진 여러 가지 기록과 자료를 검토할 기회를 가졌던 그 당시 이름난 과학자 세지윅(Adam Sedgwick)이 다윈의 부친에게 다윈도 이제 훌륭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고 극찬하였다는 내용이었다. 후에 다윈은 이렇게 술회하였다. 

    “이 편지를 읽은 후 나는 너무나 기뻐서 어센션 섬의 언덕을 껑충거리며 뛰어다녔고 조사용 망치로 돌덩이를 힘껏 내리치기도 하였다.” 

       갈라파고스에서의 조사 이후 항해에서는 별로 눈에 띌 만한 새로운 발견을 하지는 못했다. 갈라파고스에서 떠난 배는 영국을 향하여 서진을 계속하였으며 5년 간의 항해 중 타히티, 뉴질랜드, 태즈메이니아, 오스트레일리아, 모리셔스, 남아프리카, 세인트 헬레나, 어센션, 브라질 등에 기착하였다.

       비글 호가 영국에 되돌아온 것은 1836년 말 무렵이었으며 이때 다윈의 나이 27세였다. 배가 부두에 정박하자마자 다윈은 마차를 타고 집으로 달렸다. 집에 도착한 시간이 너무 늦어 다윈은 식구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근처의 여관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집안 식구들과 기쁨의 재회를 하였으며, 특히 그를 반겼던 것은 5년 만에 만난 그의 개였다. 다윈은 예전에 항상 그랬듯이 개를 데리고 오솔길을 따라 산책을 나갔다.

       다윈은 실제로 영국에서 과학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그의 지질학과 동물학에 관한 관찰 결과가 출판됨에 따라 다윈은 예리한 자연 관찰자로서는 물론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자연사학자로 알려졌으며, 또한 그는 상당한 이야기꾼이었다. 다윈의 일기, 비글 호의 항해(Voyage of the Beagle)는 그 당시 영국에서는 물론 현재까지도 인기 있는 출판물이다. 물론 다윈은 이 책보다도 변화하는 행성에서 생물이 왜 변화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를 설명한 다른 책들로 더 잘 알려져 있기도 하다.

     

    (2) 갈라파고스의 피리새

       다윈의 항해 중에 가장 중요했던 일은 아마 갈라파고스 섬에 가게 되었던 일이 었을 것이다. 그는 이 섬에 날아다니고 있었던 깜찍한 여러 종류의 작은 피리새가 후에 다윈에게 진화에 의하여 종이 변한다는 뚜렷한 증거를 제공해 주었다.

     

    '다윈의 새'라고 알려져 있는 갈라파고스의 피리새

     

       갈라파고스 피리새는 약간 짙은 색의 별로 볼품없는 새였으나 다윈은 여러 마리를 포획하여 영국으로 보내 조류 전문가에게 조사하게 하였다. 사실상 다윈은 이미 갈라파고스에서 이 새들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두 가지의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즉 이 새들은 남아메리카 대륙의 종류들과 비슷하면서도 부리의 크기, 섭식하는 방법과 같은 몇 가지 검이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고향에 돌아와서 이 문제에 대한 의문을 푸는 과정에서 다윈은 원래 남아메리카의 피리새 원종이 변해서 갈라파고스의 특징을 가진 새들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가정을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가정은 생물의 각 종들이 어떻게 해서 생기게 되었는가에 대한 직접적인 해답을 주지는 못했지만 이 가정이야말로 다윈의 진화론의 전개에 대한 기초가 되었다.

     

    (3) 자연선택설

       다윈은 1837년 초에〈종의 변화(Transmutation of Species)라는 학술지를 읽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여기에 “나의 이론”이라는 논문을 투고하게 되었다. 이 학술지에 실린 비글 호의 항해에 관한 글은 현재에도 마치 형사의 수사 기록을 읽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이 학술지의 기고를 통하여 다윈은 그의 '자연선택설 (natural selection)'의 아이디어를 다듬게 되었다. 

       다윈은 시골 출신이라서 농사에 관한 상식이 매우 풍부했다. 특히 가축의 번식에 관한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소, 말, 닭은 물론 오이도 인위적인 좋은 종자의 선택 과정, 즉 인위 선택(artificial selection)을 통하여 개선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즉, 자식은 부모를 닮게 마련이며 좋은 부모가 훌륭한 자식을 생산한다는 단순한 이치였다.

     

    '인위선택'의 예, 다양한 색깔의 옥수수

     

       다윈은 과연 이와 같은 선택이 인간의 관여 없이도 가능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농업 품종 선택의 경우에는 우선 좋은 종자의 선택 과정이 있어야 한다. 만약에 이와 같은 선택이 자연에서 일어난다면 선택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초자연적인 요인이 여기에 작용하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잘못된 선택은 결국 열등한 종자가 자손을 퍼뜨리는 것을 허용하게 되므로 개선, 변화, 또는 적응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선택이란 항상 개선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윈은 그 당시 약 30년 전에 맬서스(Reverend Thomas Malthus)가 저술한 인구 문제에 관한 글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맬서스는 모든 종들은 맹렬하게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번식은 기아나 질병에 의하여 방해받지 않는 이상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며, 자연 집단은 당대의 약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젊은 개체들이 죽어야만 균형을 이룬다고 주장하였다.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이, 그는 자연 자체가 번식을 계속할 수 있는 개체를 선택한다고 생각하였으며, 이 모든 것이 자연스러운 방법에 의하여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다윈의 일기를 보면 1838년에 진화의 수수께끼를 풀기 시작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윈은 진화의 메커니즘으로서 '자연선택'을 들었다. 

       간단히 말하면 자연선택은 1) 과다수의 자손 생산, 2) 집단내의 자연적인 변이, 3) 제한된 자원과 생존 경쟁, 4) 생존과 번식을 가능케 하는 형질을 가진 개체에 대한 환경의 선택 등을 포함한다.

       다시 말하면 다윈은 생물들은 자연적인 여건에 의하여 상당수의 자손들을 잃게 되거나 번식률이 감소하게 되므로 결과적으로 실제 남길 수 있는 자손보다 적은 수가 남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생물적, 무생물적 환경이 생존할 수 있고 번식을 계속할 수 있는 개체를 선택한다. 그러므로 생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형질은 집단내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생존에 직접 긍정적 영향을 주지 않는 형질은 점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4) 종의 기원

       위에서 소개했던 대로 다윈은 남아메리카의 동해안 지역에서 발견된 바 있는 현존하지 않는 육상 느림 보류(sloth)와 아르마딜로의 골격 화석을 관찰한 후 이것이 현존하는 종류들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 외에도 그는 남아메리카의 타조(rhea)와 아프리카의 타조(ostrich)의 유사점을 들어 이들도 역시 관련이 있으리라 추측하였다. 이와 같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사실에 대한 추리에 골몰하던 시기에 맬서스의 글을 읽은 다윈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해답이 서서히 떠오름을 느끼게 되었다.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이 그의 머릿속에 자리잡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이때쯤이었다. 다윈은 비글 호의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약 20년간이나 그의 이와 같은 진화론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는 더 시간을 보내면서도 진화론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았다. 

       결국 1856년에 라이엘과 식물학자 후커(Joseph Hooker)가 다윈에게 진화론에 대한 그의 이론을 발표하도록 설득하였다. 다윈은 진화론에 대한 그의 주장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것을 그다지 즐거워하지 않았는데, 물론 이것은 자신의 이론에 자신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그 당시 다윈은 이미 영국 내의 이름 있는 과학자로 알려져 있던 터였으나 몇 가지 이유 때문에 발표를 늦추고 있었다. 실제로 2년 후인 1858년에 다윈은 여러 권의 책에 실릴만한 분량의 자료를 단지 10개의 장(章)에 요약하여 쓰는 것으로 매듭짓고 말았다.

       같은 시기에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라는 젊은 생물학자가 멀리 떨어진 말레이 제도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도 역시 자연의 힘과 생명체의 변화가 틀림없이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맬서스의 저서를 읽은 월리스도 그의 이러한 아이디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심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열이 나고 몸이 불편하여 자리에 누워 있다가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지, 주어진 환경에 가장 잘 맞는 것이 생존을 계속할 수 있지.' 

       월리스와 다윈은 여러 가지 일에 관해서 잦은 교분을 맺고 있었으며 그는 다윈에게 그의 이러한 의견을 적어 보내었는데 이것을 받은 다윈은 상당히 낙심 천만 하였다. 수주 후에 라이엘과 후커가 학회에서 월리스와 다윈, 두 사람의 논문을 소개하기 전까지 사실상 다윈은 진화론을 월리스의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하려 하였다. 상당한 분량의 증거 자료를 갖춘 다윈의 논문이 먼저 낭독되었으나 그날 저녁의 발표는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1년 후 출판된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은 출판되자마자 첫날 1,250부가 팔리는 등 그의 진화론에 관한 관심의 열기를 보여 주었다.

     

    다윈의 저서, 종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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