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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포백무입자 의유인첩 /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의 율기육조 중 제2조 청심(淸心) - 마지막 편

정약용의 목민심서 전문/율기6조(완료)

by 수집쟁이 2020. 10. 18.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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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목민심서의 율기육조 중 제2조 청심(淸心) - 마지막 편, 마음을 깨끗이
선비와 청렴한 수령의 고귀한 삶은 '청심의 삶'이다!

목차

    율기육조 중 제2조 청심(淸心, 마음을 깨끗이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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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목민심서의 율기육조 중 제2조 청심(淸心) - 마지막 편, 선비의 마음과 같은 물
    청렴한 선비와 수령의 마음은 이와 같다

     

    凡布帛貿入者 宜有印帖

     

    음독

       범포백무입자 의유인첩

     

    해석

       무릇 포목과 비단을 사들일 경우에 인첩이 있어야 한다.

     

    해설

       고을마다 반드시 시장이 있는데, 물건을 사들이는 아전이나 하인들이 관에서 사들인다는 것을 빙자하여 포백을 강제로 헐값으로 사거나, 또는 안채나 책방이 사사로이 사들이면서 몰래 그 값을 깎거나 하면 이노들이 그 모자라는 돈을 물어넣기도 하고, 혹은 장사꾼이 앉아서 값을 손해보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 원한을 사게 되는 일인데, 관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지 못하고 있다.

     

     

     

    凡日用之簿 不宜注目 署尾如流

     

    음독

       범일용지부 불의주목 서미여류

     

    해석

       날마다 쓰는 장부는 자세히 볼 것이 아니니 끝에 서명을 빨리 해야 한다. 

     

    해설

       향교나 여러 창고의 지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지만, 주방이나 푸줏간의 지출은 절대로 자세히 보지 말고 속히 서명하는 것이 좋다. 비록 지나친 지출이 있더라도 절대로 깎아서는 안 된다.

     

     

    牧之生朝 吏校諸廳 或進殷饌 不可受也

     

    음독

       목지생조 이교제청 혹진은찬 불가수야

     

    해석

       수령의 생일에 아전과 군교 등 여러 부서에서 혹 성찬을 올리더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

     

    해설

       여러 부서에서 바치는 성찬은 모두 백성들의 재물과 노력에서 나온 것이니, 계방의 돈을 거두기도 하고 보솔의 돈을 거두기도 하는데, 이것을 빙자하여 온갖 방법을 다해 가혹하게 거두어들인다. 어민들의 물고기를 빼앗고 민촌의 개를 때려잡으며, 밀가루와 기름은 절에서 가져오고 주발과 접시는 옹기전에서 가져오니, 이는 원한을 사는 물건인 것이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겠는가.

     

    주석

    • 생조: 생일날 아침. 
    • 은찬: 성대한 음식. 
    • 계방: 공역의 면제나 다른 혜택을 입으려고 미리 관아의 아전에게 돈이나 곡식을 주는 일. 
    • 보솔: 정군의 가사를 돕기 위해 정한 사람.

     

     

    凡有所捨 毋聲言毋德色 毋以語人 毋說前人過失

     

    음독

       범유소사 무성언무덕색 무이어인 무설전인과실

     

    해석

       받지 않고 내어놓는 것이 있더라도 큰소리치지 말고, 자랑하는 기색을 나타내지도 말며, 남에게 이야기하지도 말며, 전임자의 허물도 말하지 말라.

     

    해설

       청렴하되 덕이 부족한 사람은, 혹 잘못된 전례로 생긴 재물을 내어 놓아 공적인 데 사용하기도 하고, 자기의 봉급을 떼어 내어 백성들에게 은혜를 끼치기도 하는데, 그 일이 착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내어놓을 때에 큰소리치기를,

      “사대부로 어찌 이런 물건을 쓸 수 있겠는가.”

    하고, 아전들이 혹 전례에 의하여 말하면 반드시 꾸짖거나 곤장을 쳐서 자기의 청렴함을 나타낸다. 또,

      “봉급의 남은 것으로 내 어찌 돌아가서 전답을 살 수 있겠는가.”

    하면서, 큰소리도 과장하며 잘했다는 기색이 있고, 백성을 대할 때나 손님을 대할 때나 항상 자랑하니, 그의 마음에는 수백 냥 돈을 가지고 큰 것처럼 여기고 있으나, 식자가 곁에서 보면 어찌 비웃지 않겠는가.

      재물을 내어 놓고 봉급을 떼어 낼 때에는 지나가는 말로 몇 마디 해당 아전에게 분부하고 다시는 끄집어내어 말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묻는 사람이 있으면,

      “이번에는 그렇게 내놓았지만 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라고 답하고 화제를 돌려 딴 일을 이야기하여 장황하게 늘어놓지 않는 것이 좋다. 송 나라 두연이 이렇게 말하였다.

      “벼슬살이의 첫째 요건은 청렴이다. 그러나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라. 진실로 님이 알아주기를 바라면 동료 중에 근신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므로 반드시 자기를 참소하고, 윗사람이 또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화를 당하기에 알맞을 뿐이다. 오직 묵묵히 실행하고 마음에 부끄러움이 없게 하는 것이 좋다.”

      삼국 때 위의 호질이 형주자사로 있었다. 아들 호위가 서울에서 형주로 가서 문안을 드리고 돌아오려 하니, 호질이 비단 1필을 주어 행장을 차리도록 하였다. 무제가 호위에게,

      “경의 청렴이 경의 아버지의 청렴에 비해 어떠한가?”

    하니, 호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신의 아비는 청렴하되 남이 알까 두려워하고, 신은 청렴하되 남이 모를까 두려워하니, 신이 아비만 훨씬 못합니다.”

      조선 인조 때 사람 동악 이안눌이 청백리로 뽑혔다. 일찍이 어떤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수령과 감사를 지낼 때 어찌 흠이 없었겠는가. 다만 집사람이 집안 살림을 잘하지 못하여, 내 의복과 음식과 거처에 쓰이는 물건이 남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보는 자들이 나를 청렴하다고 인정하였으니, 나는 이를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주석

    • 성언: 큰소리로 말함. 
    • 덕색: 자랑하는 얼굴빛.

     

     

     

    廉者寡恩 人則病之 躬自厚而薄責於人 斯可矣 干囑不行焉 可謂廉矣

     

    음독

       염자과은인즉병지 궁자후이박책어인 사가야 간촉불행언 가위렴의

     

    해석

       청렴한 자는 은혜롭게 용서하는 일이 적어서 사람들이 이를 병통으로 여긴다. 자기는 잘하려고 애쓰고 남에게 책임 지우는 일이 적은 것이 좋으며, 청탁이 행해지지 않으면 청렴하다 할 수 있다.

     

    해설

       아전이나 종의 무리들은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이 없어서 오직 욕심만 있고 천리는 모른다. 자신이 바야흐로 청렴하려고 애쓰는데 어찌 남을 책하랴. 자신은 예로써 가다듬고 남에게는 보통사람으로 기대하는 것이 원망을 사지 않는 길이다. 규정 외에 백성을 침해하는 것은 법으로 엄금해야 하며, 잘못 전해오는 것을 그대로 따르고 다소 너그럽게 보아주는 것이 좋다.

      조선 효종 때 사람 조극선이 수령으로 있을 때에, 아전이 관청의 새 매를 잃어버리고 다른 매 한 마리를 사서 바치니, 공이 이렇게 말하면서 그것을 물리치고 따지지 않았다.

      “매가 스스로 날아갔을 뿐이니 네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주석

    • 과은: 은혜로움이 적음. 
    • 간촉: 청탁.

     

     

    淸聲四達 令聞日彰 亦人世之至榮也

     

    음독

       청성사달하여 영문일창도 역인세지지영야니라.

     

    해석

       청렴하다는 명성이 사방에 퍼져서 좋은 소문이 날로 드러나면 역시 인생의 지극한 영화이다.

     

    해설

       고려 충숙왕 때 사람 윤선좌가 한양부윤이 되었다. 얼마 후에 왕과 왕비가 용산에 갔는데, 왕이 옆의 신하를 보고 이르기를,

      “그 곳 수령 윤선좌는 청렴하고 검소해서 목민관을 삼았으니, 너희들은 조심하여 괴롭히거나 번거롭게 하지 말라.”

    하였다. 후에 왕이 친히 수령을 발탁하다가 계림부윤을 뽑는 데 이르러 붓을 놓고 생각하다가  곧 그를 임명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조정에 신하들이 가득하지만 윤선좌 같은 사람은 없다.”

      조선 숙종 때 사람 이규령이 수원부사가 되어 정사를 청렴하고 자애롭게 하였다. 우암 송시열이 편지를 보내어 치하하였다.

      “큰물과 산이 막혀 지척에서도 남의 말을 듣지 못하지만, 어진 소문만은 귓전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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